김경빈 기자

“꼭두새벽에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밥과 반찬, 찌개거리를 양은 냄비에 담아줍니다. 그걸 차에 싣고 영업을 뛰다가 배가 고프면 경치 좋은 국도변 그늘에 차를 세웁니다. 봉고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뽕짝을 쿵쿵 소리 나게 크게 틉니다. 그러곤 버너에 불을 붙이고 찌개를 끓이죠. ‘내 마누라 오정자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고 자뻑한 뒤 밥을 먹습니다. 꿀맛입니다. 고달픈 발품팔이 영업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도봉(56·사진) 알루코그룹 회장은 신이 났다. 이 대목에서는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성공한 기업인의 아우라가 스멀스멀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전형이다.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상고, 목원대 상업교육과를 졸업하고 1988년 장안종합열처리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2002년 동양강철을 인수한 뒤 회사 이름을 알루코(알루미늄 코리아)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흙수저’가 성공하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여전히 흙수저가 더 희망이 있다고 고집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에 『현장 인문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또 한 권의, 그렇고 그런 인문학 붐에 편승한 책이 아닌가.
“인문학이 별 것인가. 땀과 꿈이 담겨 있으면 인문학이지. 인문이 무엇인가. 사람에게 문, 즉 무늬를 입힌다는 의미가 아닌가. 평생 가다(금형)와 씨름하고 살아와서 콘텐트가 조금 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흙수저 논쟁에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많다.”

-회장 집무실이 상당히 특이하다. 방금 이사한 것 같은, 아니면 이사 갈 것 같은 느낌이다.
“난 여백이 좋다. 사무실에 단 하나의 장식도 없다. 거울도 시계도 없고 그 흔한 액자 하나 걸어 두지 않고 있다. 탁자 위에도 책상 위에도 아무것도 없다. 책상과 의자, 인조가죽 소파가 전부다. 사무용품도 대개 20~30년 된 것들 그대로다. 고단했던 그 시절 그대로의 물건들이다.”

-그래도 매출 1조원대의 기업가인데 너무 소박한 것 아닌가.
“힘들었던 시절이 내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창업 초기 하루 일을 끝내면 얼굴의 뚫린 모든 구멍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막혀 있었다. 나는 가다, 우리말로 금형 전문가다. 지금에야 알루미늄 공장을 꾸려 가지만 오리지널 가다쟁이다. 버너 불을 피워 풀무질을 하는 온도가 1100도쯤 된다. 땀이 팥죽같이 흘렀다. 잠시 짬 나면 사다리를 타서 쮸쮸바를 하나 입에 물고 고통스러운 열기를 참아냈다. 그런 고난의 기억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구시대의 창업 분투기쯤으로 들린다. 요즈음 세대들에게 먹힐까.
“나는 청년실업이란 말을 몹시 싫어한다. 먼저 온몸을 던져보기라도 하고 어려움을 말해야 한다.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이 나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내 청춘은 늘 어설펐고 가난했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젊음 그 자체였다. 공부도 못했고 소아마비에다 몸까지 허약했다. 지방의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이름 없는 지방대 상업교육과를 졸업했다. 올림픽 열기로 세상이 들떠 있던 1988년 600만원으로 부천에 콧구멍만 한 가다공장을 차렸다. 눈물·콧물 흘려가며 일해 공장을 키워 갔고 납품하던 회사가 법정관리에 묶이자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동안의 어려움은 필설로 옮기기 어렵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상상의 폭을 넓히라는 말이다. 우리 회사 베트남 공장에는 5000명이 일한다. 그런데 베트남 말이 되는 한국 청년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언젠가는 아프리카 공장도 꿈꾸고 있다. 가장 어려운 것이 현지 문화와 언어에 능숙한 한국 청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패배감에 젖어 있는 청년들에게 꿈의 영토를 넓히라고 충고하고 싶다. 왜 모두가 좁은 땅덩어리 한반도 안에서 경쟁하고 있나. 나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 앞에 금수저·흙수저 논쟁은 부질없다. 낙타는 천리 밖에서도 물 냄새를 맡는다. 천리 밖의 성공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2002년 인수한 회사가 동양강철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철제 책상, 철제 캐비닛 등으로 아주 낯익은 회사다.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말도 있었다.
“맞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모두 안다.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동양강철 제품 없는 집은 없었다. 거래하던 좋은 회사가 법정관리로 넘어가자 내가 죽을 힘을 다해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나를 좋게 본 주거래 은행의 도움이 컸다. 점차 포트폴리오를 넓혔고 지금은 주력 업종이 강철이 아니라 알루미늄이다. 그래서 기업 이름을 알루미늄 코리아, 즉 알루코로 개명한 것이다. 알루미늄은 친환경 소재다. 보크사이트가 원료이고 100% 재생이 가능하다. 대량 생산 덕분에 싸구려 금속으로 인식되지만 1860년대 나폴레옹 황제는 최상류 귀족에게는 알루미늄 식기세트를, 신분이 떨어지는 손님들에게는 순금 나이프와 포크를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찬란했던 과거가 있는 금속이다. 강하고 가볍기 때문에 항공기·자동차 산업에서 각광받고 있다. 부자 나라로 갈수록 수요가 많은 대표적인 선진국형 비철금속이다.”

-제조업이 어렵다고들 한다. 서비스업·금융업에 인재가 몰린다.
“나는 제조업 신봉자다. 창조경제,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 제조업을 폄하하는 작금의 세태는 지극히 위험하다. 산업화 세대의 막내가 들려주는 고언이다. 제조업을 무시하면 안 된다. 제조업은 조강지처와 같다. 조강지처가 든든한 뒤에야 콘텐트 산업이든 뭐든 그 다음 무엇을 추구할 수 있다. 독일을 한번 보라. 그 숱한 경제 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지 않나? 제조업의 힘이다. 글로벌 히든 챔피언, 스몰 자이언츠의 독일 제조업이 지금의 강건한 독일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얘기가 너무 딱딱하다. 일밖에 모를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미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듣지 않았나.
“공장 노가다 출신이다. 지금에야 회장 소리 듣지만 평생 버너 불과 가다를 껴안고 살아 온 가다쟁이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젊었을 때 꽤 화려한 산악인의 삶을 살았다. 작은 체구에 평범한 얼굴이지만 빙벽 등반에는 나름 내공이 있다. 산악 등반은 변변찮은 인생의 탈출구쯤 되었다. 여름에는 지리산과 한라산에서, 겨울에는 설악산에서 살았다. 학기 중에는 집에서 가까운 대둔산과 계룡산 계곡에 주말마다 텐트를 치고 지냈다. 등산은 내 인생 최고의 낙이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오면 용감하게 암벽을 타던 청년은 간 데 없고 절벽 밑에 담쟁이처럼 낮게 엎드린 못난 내가 있었다. 쥐뿔 아무것도 가진 없고 실력도 없는 지방대생, 현실은 늘 막막하고 암담했다. 하지만 산은 늘 나에게 용기와 교훈을 준다. 어느 겨울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빙벽 등반을 하다 죽을 뻔했다. 같이 오르던 산악반 동기가 미끄러지면서 내 아이스 훅까지 빠지려고 했다. 떨어지면 둘 다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손에 든 피켈로 빙벽을 온 힘을 다해 찍었는데 그것이 유효했다. 하늘이 도와 천신만고 끝에 동기도 살고 나도 살았다. 그날 이후는 덤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 고락을 같이한 친구가 우리 회사 전문이사로 일하고 있다.”
 
박도봉 회장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부류의 사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매끄럽게 말하진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순연한 열정 덕분에 ‘심쿵 인터뷰’가 가능했다. 그는 스스로 ‘뽕짝 마니아’라고 밝혔다. 장사가 잘 안 돼 기분이 꿀꿀할 때는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을, 일이 좀 풀리는 날에는 ‘쨍하고 해뜰 날’을 고래고래 불렀다고 한다. 그런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그가 좋아한다는 뽕짝 ‘잡초’가 겹쳐진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 이름 모를 잡초야 /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그러나 그는 이제 많은 것을 가졌다. 사라져가는 산업화 세대 막내의 넋두리에는 기름때에 전 깊은 향기가 담겨 있었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